코코 (2018)

우리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곤 한다. 인간은 위대하고, 뭐든 해낼 수 있고, 우리만이 이 지구의 구원자라는 생각을 갖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만큼 인간이 대단하긴 하다. 발전의 발전을 거듭했고, ‘신’이 가지고 있던 영역 마저 다 가져오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는 기억이라는 것 앞에서 연약하기 그지 없다. 그 기억은 참 쉽게도 곡해되고 변해서, 다른 보조 수단이 없다면 어떤 것도 정확하게 증명해내지 못한다. 기억은 명백하게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던 것이 오기억 형성 관련 사례들이다. 없던 기억도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금 이 기술의 시대로 이끈 것은 인간이 기억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뇌 용량의 증가로 부터 온 언어의 발달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성을 가져다 주었다. 지식의 전달이 그것이다. 인간은 구어로 전해지던 기억을 더욱 길게 보관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었고, 그렇게 구성된 언어 체계는 인간을 너머 수학의 방법을 타고 기계에게 전달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의 주제를 ‘가족’이라 말한다. 나는 가족 그 자체 보다, 인간의 존재는 기억에 의해 실재할 수 있다는 것이 주제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에는 ‘팽형’이라는 형벌이 있었다. ‘솥에 넣고 끓여서 죽는다’라 말하지만, 이 형벌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끓이지 않았다. 잠깐 끓인 뒤, 그 사람을 다시 꺼내 풀어주었다. 하지만 해당 형벌을 받은 자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누구도 그를 보고도 인간으로써, 아니 생물로서 취급하지 않았다. 요즘의 말로 한다면 투명 인간 취급일 것이고, 나는 이것을 명예적 자아를 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 속, 기억 받지 못한 저승의 사람들이 그렇다. 발버둥처도 아무도 자신을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다. 언젠가 사라질 날을 기약하며, 그저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상황에서 하루를 버텼을 것이다. 주호민의 ‘신과 함께’ 속의 지옥은, 혹은 성경 속 지옥은 차라리 내가 존재하기라도 하지.

나는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는 것이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건 아마 엄마의 영향일 것이다. 기록이 없이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내 기록을 더 많이 늘여가는 것은 내 사생활이 뺏기는,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히, 나도 누군가 나를 그렇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만큼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건 그냥 내가 특이한거니까. 그래도, ‘나라는 사람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내 주변 사람들이 계속 가져가준다면, 나의 삶이 무가치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당연히 디즈니이기에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어떤 차이, 그리고 신념 마저도 이해하는 가족’이라는 컨셉트는 부럽고 또 역시 훌륭했다. 새로운 문화를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트럼프로 대표되는 보수와 차별적인 미국의 현 정세에 멕시코의 가족과 전통, 그들의 정서를 끌고온 것은 정치적으로도, 또 수익적 측면에서도 완벽한 구상이었다.